■ 활동명 : 『모순』 , 양귀자의 소설을 읽다
■ 일 시 : 2024.11.4(월) 16:00~20:00 ■ 장소 : 강옥순 고문댁(종로구)
■ 참가자 : 강성자 대표 외 회원5명
-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오늘의 소설은 이야깃거리가 풍부할 거라는 예감과 공감의 시간이었다.
- 책과 차, 정성껏 준비하신 음식과 분위기로 따뜻한 시간을 즐겼다.
책읽는 풍경의 서평가 엘리님의 글을 소개합니다.
2024년 11월 04일 책 읽는 풍경_엘리
도서 : 『모순』 양귀자 (1998년)
『모순』과 『달려라, 아비』를 통해 본 아버지에 대한 소고(小考)
<원미동 사람들>로 친숙한 양귀자의 소설<모순>을 오랜만에 읽으면서 김애란의 소설이 자꾸 겹쳐졌다. 두 소설가는 25년 나이차가 난다.
양귀자는 1955년 전주 태생으로 1988년인 43세에 소설 『모순』을 출간했다. 한편, 김애란은 1980년 인천 출신으로 단편 『달려라, 아비』를 25세인 2005년에 발표했다.
보통, 어머니와 자식간의 나이차를 30으로 본다면, <모순>에서 안진진의 어머니 나이는 70대, <달려라, 아비>에서 주인공 나의 어머니는 50대로 추측해 볼 수 있다.
20여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수퍼우먼형의 어머니와 비굴하고 초라한 아버지의 모습은 두 소설에서 유사하게 그려진다.
<모순>의 화자 안진진과 <달려라, 아비>의 주인공 나는 성격이나 말투도 비슷하다. 둘 다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아웃사이더이거나 실패한 아버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애정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래 세월 동안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시대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해왔던, 생명력 넘치는 여성들이 존재감을 드러내는 동시에 남자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여성들에 군림했던 찌질한 남자들의 민낯이 가감없이 묘사된다. 비록 딸들의 입장에서 아버지를 바라보는 최소한의 연민과 이해하려는 노력이 눈물겹지만 말이다.
1. 슬픈 일몰의 아버지 ; 『모순』속의 아버지
p.83 이제 아버지를 말할 차례다.
아버지를 말하는 일은 나에겐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 어머니는 물론이고 아버지를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단칼에 아버지를 해석해버리는 것이 나에겐 늘 의문이었다. 아버지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마 아버지 스스로도 사람들이 자신을 그런 식으로 쉽게 판단하고 생각을 그쳐버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을 것이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아무에게나 간단히 설명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은 누구에게나 치욕이었다.
특히 아버지처럼 하지 않아도 좋을 생각까지 하느라 인생살이가 고달팠던 사람에게는 두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알고 있는 한 아버지는 타인에 의해 한 번도 정확히 읽혀지지 않은 텍스트였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모독이었고 또한 아버지의 불행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아버지는 치욕에 예민했고, 자신에 대한 모독을 가장 못 견뎌한 사람이었다고. 이 진술만큼은 오류가 없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여기까지는 진실이다, 라고 나 스스로를 격려하고 나면 아버지에 대해서 조금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구는 술꾼이라 불렀고, 누구는 또 건달이라고 칭하였으며 혹자는 가끔 성격파탄자로 규정하였던 아버지에 대해. 그리고 지금은 주민등록 등본에 ‘행방불명’으로 기록되어 있는 아버지에 대해.
p.90 훗날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리거나 밥상을 뒤엎을 때도 확실히 다른 집의 망나니 술꾼과는 달랐다. 이런 표현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으나, 그래도 굳이 써본다면 아버지의 그 망나니짓에는 일종의 ‘품위’가 있었다.
그랬다. 범접할 수 없는 어떤 기운이 아버지에게 있었다. 아버지는 상스러운 욕설을 하더라도 입술을 깨물며, 이마에 푸른 힘줄을 돋우면서, 온 힘을 다해 자신도 지금 죽을 듯이 괴롭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알려주었다. 오죽했으면 나와 진모는 물론이고 맞고 있던 어머니까지도 저토록 괴로운 일을 해야 하는 아버지에 대해 순간순간 동정심을 품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을까. 어쩌면 어머니가 순순히 당하고만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는지 몰랐다. 어머니에게 직접 확인해본 적은 없지만.
p.94~95 “해질 녘에는 절대 낯선 길에서 헤매면 안 돼. 그러다 하늘이 저켠부터 푸른색으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말로 설명할 수 없을만큼 가슴이 아프거든. 가슴만 아픈 게 아냐.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 몰라. 안진진, 환한 낮이 가고 어둔 밤이 오는 그 중간 시간에 하늘을 떠도는 쌉싸름한 냄새를 혹시 맡아본 적 있니?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그 시간, 주위는 푸른 어둠에 물들고, 쌉싸름한 집 냄새는 어디선가 풍겨 오고. 그러면 그만 견딜 수 없을 만큼 돌아오고 싶어지거든. 거기가 어디든 달리고 달려서 마구 돌아오고 싶어지거든. 나는 끝내 지고 마는 거야…….”
p.268 행방불명으로 먼 세상을 떠돌던 한 인간이 속세로 귀향하기에 이만한 날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이런 말을 알고 있다. 인생은 짧다고. 그러나 삶 속의 온갖 괴로움이 인생을 길게 만든다고. 아버지는 참으로 긴긴 인생을 살았다. 그것이 진정 아버지가 원했던 삶이었을까.
2. 불행을 극복하는 어머니의 방식 ; 불행의 극대화
p.152 쓰러지지 못한 대신 어머니가 해야 할 일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었다. 소소한 불행과 대항하여 싸우는 일보다 거대한 불행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 훨씬 견디기 쉽다는 것을 어머니는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생애에 되풀이 나타나는 불행들은 모두 그런 방식으로 어머니에게 극복되었다.
p.233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극대화시켜 그 앞에 무릎을 끓는 것으로 극복의 힘을 얻곤 하던 어머니의 과장법.....
3. 달리는 아버지 ; 『달려라, 아비』에서 아버지
p.11 상상하건대, 아버지는 거절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미안해서 못 오는 사람, 미안해서 자꾸 더 미안해해야 되는 상황을 만드는 사람, 나중에는 정말 미안해진 나머지, 못난 사람보다는 나쁜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 사람, 하지만 나는 나쁜 사람이고 싶었을 만큼 착한 사람이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자신이 잘못하고도 다른 사람이 미안한 마음이 들게 하는 진짜 나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도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은, 나쁘면서 불쌍하기까지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없다.
(.......)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렇게 느렸던 아버지가 단 한번, 세상에 온힘을 다해 띈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
4. 재치와 농담으로 키운 어머니 _<달려라, 아비>
p.15 어머니는 농담으로 나를 키웠다. 어머니는 우울에 빠진 내 뒷덜미를, 재치의 두 손가락을 이용해 가뿐히 잡아올리곤 했다. 그 재치라는 것이 무지하게 상스럽기도 했는데, .....
p.16 어머니가 내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은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미안해하지도, 나를 가여워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고마웠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정말로 물어오는 것은 자신의 안부라는 것을, 어머니와 나는 구원도 이해도 아니나 입석표처럼 당당한 관계였다.
* 나의 아버지 (1929년)
연한 노란 색 햇빛이 창으로 들어와 콩 장판을 비추고 야근을 하고 돌아오신 아버지가 기분 좋은 코골이 소리를 내며 낮잠을 주무신다. 아마 잠에 떨어지기 전에 아버지는 막내인 나를 ‘아가’라 부르시며 꼬옥 껴안아 옆에 눕게 했을 터다. 아버지가 면도를 한 날은 아버지 턱수염의 깔끌한 감촉이 좋았다. 아버지는 담배를 즐기셨는데 아버지의 그 담배 향도 나는 너무 좋아했다. 담배 연기를 손부채질을 해가며 냄새를 맡을 정도로 아버지의 담배 냄새를 좋아했었다.
막내인 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그야말로 전폭적인 것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 모든 행동과 말들은 아버지의 칭찬과 자랑거리였다. (다른 형제 자매들은 아버지를 무서워했다.)
그런 시기가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까지 였을까. 이후로 아버지는 술 주정을 심하게 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으로 변해갔다. 주사는 주로 북에 두고 온 어머님이 보고 싶다고 엉엉 소리 내어 우는 것으로 시작되었던 것 같다. 심하게 드신 날은 행패에 가까운 주사를 부렸다. 가족들은 아버지의 행패를 피해 이웃집으로 피신해야 했을 정도였다. 다음 날 아침이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쩡해진 아버지가 낯설었을 것이다. 유년의 어린 내가 그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지났을까. 그런 경험이 나의 내면 어떤 부분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 무렵 어머니는 어떠했을까. ‘우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던 시대였으나, 절대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깨알같은 글씨와 숫자로 가계부를 적었다. 1년치 쌀을 사다 대청마루 한 구석에 쟁여놓으셔야 맘이 놓이셨다. 오래 보관한 쌀은 바구미가 생겨 골치를 썩이기도 했다.
몸이 건강한 편이셨는데, 몸에 좋다는 보약을 많이 해 드셨다. 약용 개구리를 삶아 드시거나, 말린 지네를 고아 드시거나. 개미를 키워 산채로 물과 함께 드신 적도 있었다. 봄에는 진달래꽃을 채취해서 진달래술을 직접 만들어 드시기도 했다. 오래 묵혀둔 진달래술은 알콜 농도가 높아 드시고 쓰러지신 적도 있다.
교육열도 높아 매일 정해준 분량의 한자를 외워 한자 시험을 치게 했다. 야근하고 돌아오시면 그 전날 공부한 한자를 외워 쓰게 하는 식이었다. 아버지의 기대에 못 미치는 자식은 호되게 야단을 맞거나 내쳐지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작은 오빠와 작은 언니)
평생을 철도 공무원으로 일하신 아버지. 내가 고3때 아버지는 뇌경색으로 쓰러져 그 후유증으로 부분적인 언어 상실을 겪으셨으나 거의 초인적인 노력으로 극복해내셨다. 그 지난한 과정에서, 직장에서는 말단 직위로 내려갔고 근무처도 서울이 아닌 경기도 외곽에 있는 역사로 옮겨 다니셔야 했다. 수모라면 수모를 당한 것일진대, 아버지는 꿋꿋하게 정년까지 소임을 다하시고 퇴임을 하셨다. 몸에 밴 근면함과 꾸준히 노력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내가 30을 앞두고 있었을 즈음, 아버지는 나의 결혼을 서두르셨다. 급기야 전문 중매인을 알아보기까지 하셨다.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점이다. 그렇게 예뻐했던 막내딸을 어찌 그리 빨리 시집보내려고 하셨을까.
아버지는 퇴직 후 얼마 안 되어 뇌경색이 재발하였고 돌아가시기 몇 해 전까지 치매를 앓았다. 6~7년을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는데 그 기간은 내가 직장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여유가 없던 때라 아버지를 자주 찾아뵙고 돌봐드리지 못했다. 그것이 회한으로 남았는지 아버지 장례식 때 나는 그 누구보다도 서럽게 울었다. 막내라 더 슬퍼 저렇게 운다고 사람들은 말했지만, 나는 아버지의 외로움과 고난의 여정을 지켜보면서도 아무런 위안도 되어드리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숨을 못 쉴 정도로 슬피 울었다.
* 작가 노트
----- 작가의 말_김애란
‘나는 문학이 나의 신앙이 되길 바라지 않습니다. 소설을 쓰는 데 배움이나 경험이 반드시 중요하다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소설 안의 어떤 정적, 그런 것이 나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도 언제나 당신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작가노트-양귀자
‘작가란 주어진 인생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현실을 소설 위에 세우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서 한 번뿐인 삶을 반성하고 사색하게 하는 장르가 바로 소설이라고 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여일하게 믿어왔다. 주어진 인생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이야기와 새로운 현실에서 얻은 감동을 더불어 나눌 수 있는 세상, 그것이 바로 작가가 꿈꾸는 세상이다.’
■ 향후 계획
- 12월 도서 : 희랍어 시간, 한강
전체댓글수 (0)